장막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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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막은 후한 말, 팔주 중 한 명으로 젊은 시절부터 의협심이 강하여 곤궁한 사람을 돕고 조조, 원소와 친분을 맺었다. 동탁 토벌에 참여하고 반동탁 연합군에 가담했으나, 원소와의 갈등과 조조와의 우정 사이에서 갈등했다. 조조가 서주를 공격한 틈을 타 여포를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순욱 등의 활약으로 연주를 빼앗지 못하고, 결국 조조에게 패하여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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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말 동탁을 섬긴 무장 이몽은 반동탁 연합군 토벌에 가담하고 동탁 사후 이각, 곽사와 함께 장안을 공격하여 왕윤 정권을 무너뜨렸으나, 195년 무군중랑장 재직 중 이각에게 살해당했다.
장막 (삼국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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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장막 |
로마자 표기 | Jang Mak |
한자 표기 | 張邈 |
자(字) | 맹탁(孟卓) |
로마자 표기 | Maengtak |
출생지 | 후한 연주 동평군 수장현 |
사망일 | 195년 |
사망 원인 | 타살 |
국적 | 후한 |
관직 및 역할 | |
주요 경력 | 기도위 → 진류태수 |
활동 | 정치가 겸 군벌 |
인간 관계 | |
형제 | 장초 |
적대 세력 | 원소, 조조 |
주요 활동 | |
참여 전투 | 동탁 토벌전, 연주 공방전 |
2. 생애
동탁전의 『후한서』 "한말명사록"이나 "당고전"에 따르면, 장막은 한의 팔주 중 한 명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남자다운 기개와 너그러움을 지녀 곤궁한 사람을 돕는 데 낭비를 아끼지 않았다.[14] 조조, 원소와는 친한 친구처럼 사이가 좋았고,[15] 두뇌의 명석함과 덕행으로 관료 사회에서 알려졌다. 삼공의 부름을 받았으며, 성적 우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기후위를 맡은 후, 동탁의 명사 우대책의 일환으로 진류군 태수에 임명되었다.
190년, 원소를 맹주로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었을 때, 장막은 조조 등과 함께 참전했다.[16] 유대, 원유, 교모, 포신과 함께 산조에 주둔했지만, 대부분의 제후들은 술잔치만 하고 싸움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17] 조조가 싸울 것을 촉구하자, 장막은 포신과 함께 조조의 요청에 응하여 부하 위자를 조조와 동행시켰다. 그러나 조조 일행은 동탁군의 서영에게 크게 패배하여 위자는 전사하고, 산조의 군세도 군량이 떨어져 해산되었다.
원소는 동탁을 토벌하기 위해 모인 제후들에게 거만한 모습을 보였는데, 장막은 원소에게 자신의 행동을 고칠 것을 간언했지만, 오히려 원소의 노여움을 사 죽을 뻔했다. 이때 조조가 원소를 말린 덕분에 위기를 넘겼고, 장막은 이 사실을 알고 조조에게 은혜를 느꼈다.
장안에서 정변이 일어나 여포는 동탁의 부하인 이각 등에게 패하여 도망쳐 원소에게 의탁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다툼이 일어나 여포는 원소의 곁을 떠나게 되었고, 장막은 여포와 친교를 맺게 되었다. 이는 원소의 미움을 샀고, 장막은 조조가 원소와의 우정을 우선시하여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194년, 조조가 서주의 도겸을 공격하기 위해 본거지를 비웠을 때, 장막은 조조군의 진궁에게 "지금이야말로 조조의 영지를 빼앗을 호기"라고 꾀임을 받고, 조조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동생 장초에게도 설득당하여, 그들과 결탁하여 여포를 맞이하고 조조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장막과 여포는 단기간에 조조의 본거지인 연주의 대부분을 점령했고, 급보를 듣고 되돌아온 조조군을 격퇴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순욱, 정욱, 하후돈, 조지 등이 지키는 세 개의 성은 함락시키지 못해 조조의 세력에 결정타를 가할 수 없었다. 그 후, 기근이 발생하여 양측의 싸움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195년, 기세를 회복한 조조에게 패배하여 연주에서 철수했다. 여포나 진궁 등은 도겸으로부터 서주를 양도받은 유비를 의지하여 도망쳤다. 장막은 진류에 있던 동생과 단절되었기 때문에, 진류의 일족을 구출하려 원술에게 원군을 요청하러 갔지만, 부하의 배신을 당해 죽임을 당했다. 전후하여 진류는 함락되었고, 장초 등 장막의 유족은 조조의 추격을 피해 옹구로 옮겨졌다. 이때 이미 조조가 장안의 천자로부터 정식으로 연주목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장막 일행은 적의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196년, 옹구는 조조군의 공격으로 함락되었다. 장초는 분신 자살하고, 장막의 삼족(부모, 형제, 친자식과 양자)은 조조에 의해 몰살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명성
연주 동평국 수장현(壽張縣, 현재의 산둥성 랴오청시 양구현) 출신이다. 젊을 적부터 의협심이 있어 가난하거나 위급한 자들을 구제하는 데에 집안을 아낌없이 기울였다. 이에 재물로 타인을 구한다는 팔주(八廚) 중 한 명으로 이름이 높았으며[18] 많은 선비들이 따랐다. 조조, 원소와도 교우하였다. 공부(公府)에 불려가 고제(高第)로써 기도위를 지냈다.189년(중평 6년), 진류태수로 승진했다.[4]
2. 2. 동탁 토벌전 참여
189년(중평 6년), 진류태수로 승진해 다른 관리들과 함께 동탁 토벌을 모의하였다. 마침 광릉태수로 있던 동생 장초도 와서 이를 상의하였다. 190년(초평 원년), 반동탁 연합군이 궐기하였다. 장막은 연주자사 유대, 예주자사 공주, 동군태수 교모, 장초, 장홍과 나란히 진류군 산조현(酸棗縣)에서 맹세하였다. 역시 연합군에 참여한 조조가 하남윤 성고현(成皋縣)으로 진격했으므로 장막이 위자를 붙여주었다. 위자는 형양현(滎陽縣)의 변수(汴水)에서 서영과 교전하다 전사하였고[19] 조조는 패배하였다.[20] 장막 등은 전진을 미적거리다가 식량이 다 떨어져 해산하였다.[21]190년, 장막과 조조는 동탁에 맞서 처음으로 무기를 들었고, 이로 인해 연합군이 결성되어 동탁 토벌전이 시작되었다. 형양의 변수 전투에서 장막은 부하 위자를 보내 조조를 지원하게 했다. 당시 연합군 수장이었던 원소는 오만하게 행동했고, 장막으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 원소는 격분하여 조조에게 장막을 죽이라고 했지만, 조조는 "맹탁(孟卓)은 우리의 친구이니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지금 천하는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니 내부 갈등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장막은 이 소식을 듣고 조조에게 매우 감사를 표했지만,[5] 동시에 불안감을 느꼈다.[6]
2. 3. 원소와의 갈등과 조조와의 우정
190년, 반동탁 연합군의 맹주였던 원소가 교만하게 행동하자 장막은 올바른 도리로 비판하였다. 원소는 조조에게 장막을 죽이라고 명했으나, 조조는 '장막은 친한 벗이니 시비를 용납해야 하며,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우리끼리 해쳐서는 안 된다'며 거절하였다.[5] 장막은 이 소식을 듣고 조조를 더욱 은혜롭게 여겼다.[6]193년, 연주를 다스리던 조조는 서주목 도겸을 정벌하러 가면서 가족들에게 ‘자신이 돌아오지 못하면 장막을 의지하라’고 당부하였다. 조조가 서주 정벌에서 생환하여 장막과 서로 눈물을 흘리며 마주했을 정도로 그 친분은 깊었다.[7]
한편, 여포가 원소에게 의탁하고 있었는데, 원소와의 사이가 틀어지자 원소는 여포를 제거하려 했다. 여포는 원소에게서 벗어나 하내태수 장양에게 의탁했다. 그 길에 진류를 지나가게 된 여포를 장막이 후대하고 깊은 교분을 맺었다.[8] 원소는 지난 일도 있었고, 여포와 장막이 친분을 맺은 것을 알고 장막을 더욱 미워하였다. 장막은 조조가 결국 원소를 위해 자신을 칠까 두려워했다.[9] 게다가, 장막이 다스리는 진류는 조조의 관할 지역인 연주에 속해 있었다.
2. 4. 여포와의 만남과 배신
194년(흥평 원년), 조조가 도겸을 다시 공격하러 간 사이, 장막의 동생 장초는 조조의 장수 진궁, 종사중랑(從事中郞) 허사, 왕개와 함께 연주에서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 진궁은 장막을 설득하여 "바야흐로 여러 영웅들이 들고일어나 천하가 나뉘었습니다. 군께선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사방이 적으로 통하는 땅에 서계십니다. 칼을 쥐고 주위를 살피기만 하면 족히 인걸이 될 수 있는데도 타인에게 속박만 당하고 있으니 어찌 비루하지 않다 하겠습니까! 지금 연주는 동쪽을 치느라 텅 비어있습니다. 그리고 여포는 장사로서 맞설 상대가 없을 정도로 싸움을 잘합니다. 여포와 함께 연주를 장악하고 천하 형세를 주시하며 때가 오기를 기다린다면 한 시대를 종횡할 것입니다." 라고 설득했다.[10] 장막은 진궁의 설득에 동의하여 여포를 연주로 초청했다.진궁은 동군 (東郡; 현재의 랴오청, 산둥 성 일대)에서 부하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여포와 합류했고, 복양 (濮陽; 현재의 푸양, 허난 성 일대)을 점령했다. 여포는 연주 자사(兖州牧중국어)로 선포되었다. 연주의 여러 군과 현들은 여포의 부름에 호응하여 그의 편으로 돌아섰지만, 권성, 동아, 범현은 여전히 조조의 통제하에 있었다.[10]
조조 대신 제음군 견성현(鄄城縣)에 남아 정무를 보던 순욱에게 유익(劉翊)을 보내 '여포가 조조의 도겸 정복을 도우러 왔으니 조속히 군량을 보내달라’고 속였으나 간파당했다. 장막과 진궁 등은 여포를 연주목으로 추대했으며 견성, 동아, 범 등 몇 개 현을 제외한 대부분의 군현이 호응하였다. 다만 순욱의 신속한 대처 탓에 견성의 통모자들은 처단되고 예주자사 곽공(郭貢)의 협조도 받아내지 못했다.[22]
반란과 여포의 침입 소식을 들은 조조는 서주 원정을 중단하고 연주로 돌아왔고, 여포와 조조의 군대는 복양에서 격돌했다. 조조는 여포를 제압하지 못했고, 양측은 100일 넘게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 무렵, 이 지역에는 가뭄과 황충(蝗蟲)이 덮쳐 곡식이 부족해지는 바람에 결판을 내지 못했다.[11] 여포는 근거지를 동쪽의 산양(山陽; 현재의 산둥 성 남부)으로 옮겼다. 2년 안에 조조는 연주에서 모든 영토를 되찾았고, 거야현 전투에서 여포를 격파했다. 여포는 서주로 도망쳐 유비에게 의탁했고 장막도 이를 따라갔다.[11]
2. 5. 연주 전투와 최후
194년(흥평 원년), 조조가 도겸과의 다른 전투로 자리를 비운 사이, 장막의 동생 장초는 조조의 부하인 진궁, 허사, 왕개와 함께 연주에서 조조에 반기를 들었다. 진궁은 장막을 설득하여 조조에게 반역하게 하고 여포를 연주로 초청하는 데 성공했다.[10] 진궁은 장막에게 다음과 같이 설득했다. "지금 여러 영웅들이 일어나 천하가 나뉘었습니다. 당신께서는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땅에 서 계십니다. 칼을 쥐고 주위를 살피기만 하면 영웅이 될 수 있는데, 남에게 속박만 당하고 있으니 어찌 비루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연주는 동쪽을 공격하느라 비어 있습니다. 여포는 용맹한 장수로 맞설 자가 없을 정도로 싸움을 잘합니다. 여포와 함께 연주를 장악하고 천하의 형세를 주시하며 때를 기다린다면 한 시대를 주름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장막도 이에 동의하여 여포를 맞이했다.동군 (현재의 랴오청, 산둥 성 일대)에서 부하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여포와 합류했고, 복양 (현재의 푸양, 허난 성 일대)을 점령했다. 여포는 연주 자사(兖州牧중국어)로 추대되었다. 연주의 여러 군과 현들은 여포의 부름에 호응하여 그의 편으로 돌아섰지만, 견성, 동아, 범현은 여전히 조조의 통제하에 있었다.[10] 조조 대신 제음군 견성현(鄄城縣)에 남아 정무를 보던 순욱에게 유익(劉翊)을 보내 '여포가 조조의 도겸 정벌을 도우러 왔으니 빨리 군량을 보내달라'고 속였으나 간파당했다. 장막과 진궁 등은 여포를 연주목으로 추대했으며 견성, 동아(東阿), 범(范) 등 몇 개 현을 제외한 대부분의 군현이 호응하였다. 다만 순욱의 신속한 대처로 견성의 통모자들은 처단되었고, 예주자사 곽공(郭貢)의 협조도 얻어내지 못했다.[22]
반란과 여포의 침입 소식을 들은 조조는 서주 원정을 중단하고 연주로 돌아왔고, 여포와 조조의 군대는 복양에서 격돌했다. 조조는 여포를 제압하지 못했고, 양측은 100일 넘게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 무렵, 이 지역에는 메뚜기 떼와 가뭄이 덮쳐 백성들은 기근에 시달렸고, 많은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인육을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포는 근거지를 동쪽의 산양(山陽; 현재의 산둥 성 남부)으로 옮겼다.[11] 여포는 동군 복양현(濮陽縣)을 거점으로 삼았고 조조는 급히 서주에서 회군하였다. 유리한 상황에서 백여 일을 교전했는데 가뭄에 황충(蝗蟲)이 덮쳐 곡식이 부족해지는 바람에 결판을 내지 못했다. 여포는 산양군으로 이동하였다.
195년, 2년간의 전쟁 끝에 결국 패하였다. 여포는 도겸 사후 서주를 통치하던 유비에게 투항하였고 장막도 이를 따라갔다. 이때 장초는 진류군 옹구현(雍丘縣)에 남겨 가족을 돌보게 했다. 조조가 이곳을 공격하자, 장막은 원술에게 원군을 부탁하러 가던 도중 부하들에게 살해당했으며, 진류에 남아있던 가족들도 몰살당했다.[12]
《헌제춘추》중국어에는 원술이 한때 장막 등과 함께 황제를 칭하는 것에 대해 논의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는 197년 초에 황제를 칭했다. 장막은 원술에게 황제를 칭하는 것을 만류했다. 배송지는 《삼국지》에서 장막의 전기를 주석하면서 《헌제춘추》중국어의 기록에 다소 모호함이 있다고 논평했는데, 장막의 전기에는 그가 원술의 진영에 도착하기 전에 자신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13] 그는 이전에 원술을 만났을 가능성이 있었다.
3.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190년 조조가 제후들에게 격문을 띄우자 이에 응하여 반동탁 연합군에 참가하였다.
194년 조조가 도겸을 공격하자 중재에 나섰으나 거절당했다. 이때 장막에게 의탁하고 있던 진궁의 권유로 여포에게 연주를 바쳐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고, 조조와 수없이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였다.
195년, 정도(定途)에서 조조군에게 패하자 원술에게 의탁하였다.
4. 가계
- 동생 : 장초
5. 섬긴 사람들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문서
The Zizhi Tongjian indicated that Zhang Miao died in the autumn (7th to 9th month) of the Xing'ping era of Emperor Xian's reign. This corresponds to 24 Aug to 19 Nov 195 on the Julian calendar.
[3]
서적
Sanguozhi
[4]
서적
Sanguozhi
[5]
서적
Sanguozhi
[6]
서적
Houhanshu
[7]
서적
Sanguozhi
[8]
서적
Houhanshu
[9]
서적
Sanguozhi
[10]
서적
Sanguozhi
[11]
서적
Sanguozhi
[12]
서적
Sanguozhi
[13]
서적
Xiandi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14]
문서
党錮の禁
[15]
문서
袁紹とは、許攸・何顒・伍瓊達と共に「奔走の友」と呼ばれる契りを結んだとあり(「袁紹伝」)、曹操とは、互いが死んだ時に家族の面倒を見る事を約束するほどに仲が良かったとある。現に193年、曹操が徐州討伐に向かったとき、家族に対し「わしに万が一もしものことがあれば、孟卓(張邈)を頼れ」と述べている。
[16]
문서
「臧洪伝」によると、挙兵後に酸棗で弟や孔伷など一部の諸侯と共に会盟をしている。
[17]
문서
当時董卓に仕えていた鄭泰によると、張邈は「勉強ばかりして書斎に閉じ籠もり、座敷を覗こうともしない人物」と言われている(鄭渾伝が引く『漢紀』、『後漢書』鄭泰伝)。
[18]
서적
《후한서》67권 열전 제57 당고의 화열전
[19]
서적
《삼국지》22권 위서 제22 위진
[20]
서적
《삼국지》1권 위서 제1 무제 조조
[21]
서적
《삼국지》7권 위서 제7 장홍
[22]
서적
《삼국지》10권 위서 제10 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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